
“환자를 살렸는데, 감옥에 간다”
이 문장은 요즘 필수의료 종사자들 사이에서 현실을 풍자하는 슬픈 자조로 회자되고 있다. 방어진료가 일상화되고, 젊은 의사들은 응급의학과·소아과·산부인과 등 필수과 진입을 꺼리는 이유에는 ‘사법의학’이라는 새로운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고의성 없는 의료사고도 실형…사법 판단에 무너지는 현장
최근 몇 년간 의료 현장을 강타한 잇따른 고액 배상 및 실형 판결은 의료계에 깊은 불신과 공포를 남겼다.
예를 들어 생후 5일 신생아를 수술한 외과의사가, 소아외과 전문의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수술이 지체됐다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의료현장 특수성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 의료계의 주장이다.
이런 판결들은 응급 상황에서의 빠른 판단과 행동을 위축시키고, 결국 환자의 생존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우려다.
“소송당하느니 수술하지 않겠다”…무너지는 필수의료
실제 대한산부인과학회의 조사에 따르면 산부인과 레지던트 4년차의 절반가량이 ‘앞으로 분만을 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는 단연 ‘의료사고 발생 시 법적 책임’ 때문이었다.
분만 하나에 10만 원을 벌지만, 실수하면 10억 원을 물게 되는 현실에서 누가 이 과를 선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소아과, 응급의학과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설소대 수술 후 장애가 발생한 사건, 폐암 진단 지연 사례, 응급 삽관 도중 발생한 의료사고 등에서 5억~17억 원대의 판결이 잇따라 나오며, 필수의료 의사들은 ‘언제든 피고가 될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법원과 의료,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간극
법원은 환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주의의무”를 요구하지만, 의료현장은 완전무결한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복잡한 생명의 현장이다. 특히 소아외과, 응급수술, 산과 등은 환자 상태가 시시각각 변하고, 의사 개인이 모든 선택을 책임지기 어려운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의료계는 이 현상을 ‘사법의학’이라 부르며, 현실과 유리된 법원의 판단이 결국 필수의료를 몰락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방어 진료 늘고, 환자 치료는 더 늦어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의사들은 ‘모든 진료에서 법적 리스크’를 우선 고려하는 방어 진료를 택할 수밖에 없다. 전공과 외 환자는 피하고, 기록은 지나치게 방대하게 남기며, 수술은 가능한 한 미룬다. 그 결과는 결국 환자 치료 지연과 의료 접근성 악화로 이어진다.
특히 응급의학과에서는 ‘응급실 뺑뺑이’가 현실이 됐다. 환자는 이 병원 저 병원을 돌다 결국 사망하거나 상태가 악화되고, 의사는 수련생 시절의 판단 하나로 형사처벌을 받는다.
의료계의 요구는? “현장을 이해한 사법체계 필요”
의료계는 의료사고에 대한 합리적 책임 구조를 요구하고 있다.
의도성이 없고, 당시에 가능한 최선의 조치를 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형사처벌을 면제하거나 면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진료지침(가이드라인) 준수 여부 ▲전문 인력 부족 등의 불가항력 사유 ▲환자 및 보호자 설명 및 동의 여부 등을 법원이 적극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의 판결들이 계속된다면, 더 이상 필수의료를 담당할 의사는 남지 않을 것이다. 환자를 위한 법원이 되려면, 의사와 환자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판결이 필요하다. 사법이 의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이 의료의 본질을 이해하는 시대가 절실하다.
이기훈 기자 (gihun.lee@diid.kr)

